단아한 모습, 인생의 경지를 달관한 듯한 여유로웅, 부드러운 미소의 노신사,
지난해 H호텔 백합 홀 앞에서 뵙게 된 은사의 모습이다.
" 선생님! 저 기억하시겠어요?"
" 아, 그럼. 너 고3 때 우리 반 반장 하던 녀석 아니냐?"
여고를 졸업하고 30년만에 처음으로 은사 세 분을 모시고 동창회를 했던 날이었다.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자리잡고 앉은 몇몇 애들에게 선생님께서는 자녀는 몇을 두었느냐, 몇 살이나 먹었느냐, 그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둥 일일이 자상하게 물어보시며 교직자다운 관심을 보이셨다.
3학년 1반 교실.
왁짜지껄하던 분위기가 한 사람의 출현으로 일순간 조용해졌고, 그 분은 다름 아닌 우리반 담임으로 부임하신 조세용 선생님이셨다.
푸른빛을 띨 정도로 깍인 수염 자리의 정결함, 굵은 검은 안경테 안경 너머로 우리를 쫙 둘러보실때 , 우리 교실에는 숨이 막힐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이 녀석들아, 나는 너희들 맘속에 있는 작은 비밀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듯 선생님의 눈빛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척한 몸매, 신경질적인 듯한 분위기,일년 내내 웃으시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속에서 칠판에 자신만만하게 써 내려가시는 그 특유의 달필 때문에 우린 선생님의 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30대 중반이셨을 선생님, 고3 담임이라는 중압감,주요 과목 담당이어서 할당된 수업 시간도 많으셨겠고, 무엇보다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으로서의 삶의 무게가
선생님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으리라.
그 당시 여고 졸업이었던 우리들을 덩치만 컸지 철도 없어 선생님 속을 무던히도 상하게 해 드렸던 같다. 일차적인 원인은 학생들 자신에게 있었고, 교장 선생님께서 여성상위 시대를 내다 보시고 우리 아이들의 기를 맘껏 살려 놓으셨던 이유도 있었다.
특이한 교복 덕분에 타 학교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금란여고에는 수도꼭지를 틀면 우유가 나온다는 헛소문이 돌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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