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속으로

30년의 세월 (1)

하늘향기내리 2005. 6. 20. 22:24
LONG
그랬기에 오늘날 공주병 증상의 원조라고 생각되는 여러가지 일들이 발생하곤 하였다. 그 반면에 선생님들께서는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셨던것 같다.
 여름방학을 한 달여 앞둔 어느날. 선생님께서 쓰러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폐가 안 좋으셨다던가,과로가 겹치셨다던가 지금의 강북 삼성병원(고려병원)에 입원하셔서 치료를 받고 계셨다.
선생님을 찾아 뵙기 전에 누구의 발상인지 병문안 때 금반지를 해드리자는 얘기가 나왔다.
선생님 말씀 안 듣고 천방지축 굴었던 잘못을 사죄하는 심정으로 우린 그때 자못 심각했었다. 학생 신분으로 반 돈 정도의 반지였거나 실반지였으련만.... 임원 몇명이 병실을 찾았을 때, 선생님께서는 핏기 없는 핼쓱한 얼굴로 우릴 맞아 주셨다. 어린 마음에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왜 깊은 병이나 폐병에 걸리고 또 요절하는 것인가, 나는 문학소녀다운 감상에 젖어 창백한 선생님의 모습을 미화시켜가고 있었다. 반 대표인 내가 선생님께 다가가 반지를 끼워드리려고 했을 때,선생님께서는 한 손으로 반지를 받아쥐시며 힘없이 웃으시기만 하셨다. 참으로 쑥스러운 장면이었다.
  여름방학이 지난 어느 날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 너 그렇게 해서 대학갈 수 있겠니? 집안 형편이 어렵다고 아주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 당시 졸업하고 나면 취직을 하려고 마음 먹었기에 여름방학때, 친구 몇 명과 을왕리 해수욕장까지 놀러 갔다온 상황이었다. 그 이야기를 선생님께선 알고 계셨던것 같았다. 공부를 좀 하는 축에 들었던 제자의 외도(?)에 가슴 아프셨던 모양이었다. 어찌나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 보시는지,
나는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정을 느끼며, 최선을 다하지 못한 나의 학업에 대한 미련 때문에 마음속으로 울었다.
 6.25 당시 군의관이셨던 아버지. 전쟁의 와중에서 한 생명이 잉태되었고, 그 어린 딸이 백일도 되기전 아버지는 부상병 치료하시다 공비들이 쏜 총에 맞아 돌아가신 것이다. 학창 시절 그토록 듣기 싫었던 `군경 유자녀`라는 단어, 이제는 자랑스럽게 장성한 아이들을 앞세우고 국립묘지를 찾아가지만 그때는 왜 그리 싫었는지~~
 그해 가을이 깊어갈 무렵, 국어 시간에 <가을>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쓰라고 하셨다. 60명의 글 중에서 세 사람의 글이 뽑혔는데 자신의 글을 교단 앞에 나와 낭독하라고 하셨다. 재순이의 글은 수필가로서의 자질이 보인다며 칭찬하셨고,내 글을 너무 감상적이고 우울하다며 자신감을 가지고 모든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라고 격려해 주셨다.
ARTICLE

 단아한 모습, 인생의 경지를 달관한 듯한 여유로웅, 부드러운 미소의 노신사,

지난해 H호텔 백합 홀 앞에서  뵙게 된 은사의 모습이다.

 " 선생님! 저 기억하시겠어요?"

 " 아, 그럼. 너 고3 때 우리 반 반장 하던 녀석 아니냐?"

 여고를 졸업하고 30년만에 처음으로 은사 세 분을 모시고 동창회를 했던 날이었다.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자리잡고 앉은 몇몇 애들에게 선생님께서는 자녀는 몇을 두었느냐, 몇 살이나 먹었느냐, 그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둥 일일이 자상하게 물어보시며 교직자다운 관심을 보이셨다.

 

 3학년 1반 교실.

 왁짜지껄하던 분위기가 한 사람의 출현으로 일순간 조용해졌고, 그 분은 다름 아닌 우리반 담임으로 부임하신 조세용 선생님이셨다.

 푸른빛을 띨 정도로 깍인 수염 자리의 정결함, 굵은  검은 안경테 안경 너머로 우리를 쫙 둘러보실때 , 우리 교실에는 숨이 막힐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이 녀석들아, 나는 너희들 맘속에 있는 작은 비밀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듯 선생님의 눈빛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척한 몸매, 신경질적인 듯한 분위기,일년 내내 웃으시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속에서 칠판에 자신만만하게 써 내려가시는 그 특유의 달필 때문에 우린 선생님의 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30대 중반이셨을 선생님, 고3 담임이라는 중압감,주요 과목 담당이어서 할당된 수업 시간도 많으셨겠고, 무엇보다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으로서의 삶의 무게가

선생님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으리라.

 그 당시 여고 졸업이었던 우리들을 덩치만 컸지 철도 없어 선생님 속을 무던히도 상하게 해 드렸던 같다. 일차적인 원인은 학생들 자신에게 있었고, 교장 선생님께서 여성상위 시대를 내다 보시고 우리 아이들의 기를 맘껏 살려 놓으셨던 이유도 있었다.

특이한 교복 덕분에 타 학교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금란여고에는 수도꼭지를 틀면 우유가 나온다는 헛소문이 돌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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