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모목사, '밧모섬' 및 '소아시아 일곱교회'순례기
▲밧모섬(Patmos; Batmoz) 순례기
2006년2월12일,
주일아침, 일찌기 쿠사다시(Kusadashi)
항구에서 밧모섬으로 향하는 전세선에 올랐다. 사도 요한님께서 계시받은 동굴을
찾아가서 계시의 현장을 기억에 담고, 계시의 현장증인이 되고자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아가는
길이다. 밧모로 가는 길에 안내자는 ‘호머의 고향’과 ‘피타고라스’의
고향이 각기 저쪽 섬들이라며 손가락을 펴고 열심히 가리켜 주는데, 대부분 에게해의 마르마라해협에 있는
섬들로서, 현재 행정상, 그리스 영토라고 소개한다. 밧모섬 역시 그리스에 속한 까닭에, 따로 입국허가 스탬프를 받은
연후, 상륙할 수 있었다.
밧모섬으로 오는 동안 약간의 멀미가 느껴졌으나, 섬에 상륙하니
새로운 기운이 솟는다. 아내도 멀미를 할 지 언정,
밧모섬순례를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더니, 잘 견뎌내었다.
2000년전 88세 고령으로 나뭇잎 처럼 흔들거리는 작은 배를 타고 하루종일 항해하셨을
대사도 요한님을 생각해보면 그 정도의 고통이란 아무런 핑게거리가 될 수 없음이다.
사도요한께서는 일찌기 ‘도미시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 때에 에베소에서 추방되어 이곳에서 18개월간을 귀양살이 하셨다고
전한다. 그분이 머물렀던 바위동굴은 40여명이 서있을 만한 공간으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1088년에는 로마황제 콤니누스1세가 밧모섬 전체를 성지로 선포하였고, 1713년에는 희랍정교회의 신학교가 세워졌다고 한다.
지금은 3000여명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중.고등학교도 있으나, 물이 귀해서 빗물을
받아 마시거나, 우기가 아니면 다른 섬에서 조달한다고 한다.
바위로 된 동굴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사도요한께서 누우셨던 곳, 고령의 불편한 몸을 일으키시고자 바위벽에 턱진 곳을 손으로 짚으셨던 자리,
천정부근에서 세갈래로 갈라진 바위틈은 사도요한께서 들으신 하늘의 천둥소리 같은 큰 음성이 들릴 때에 갈라졌다고 전해졌는데, 이는 삼위일체를 증거한다고 안내자가 설명을 하였다. 안내자가 말을
마치니, 갑자기, 누군가 “송목사님이 기도하세요!”라고 말하기에 순종하여 기도를
담당하였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고요하게 찬양을 드리고,
사도요한의 계시동굴에서의 감격적인 기도를 올리었다. 물론 미리 정해진 순서가
따로 없었으며, 내게 주어질 기회가 아님에도, 이는 천사가
내게 전하여 준 하늘의 명령이었기에 영광된 직분을 맡겨 주시다니…할렐루야! 아멘.
88세가 되신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1년6개월을 머무셨다고 하며, 그곳에서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내신 계시의
말씀을 받았고, 계시록의 환상을 주께받아 기록하였다고 한다.
오래된 수도원을 방문하고 되돌아 오니, 어두운 밤이다.
▲에베소(Epesus)에서
에베소의 유적지는 너무나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서, 온전히
하루시간을 다 사용하여야 할 정도라고 한다. 유적탐사팀이 찾아낸 여러 장소 중에, 특히 눈에 띄이는 곳은 ‘황소복음’으로 별명지어진 의사 ‘누가’의 무덤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의 무덤이 이 곳에
있는지도 모르고 찾아 온 것이 부끄러웠으나, 묘지기둥에 황소그림이 있고, 십자가가 아로새겨진 문양이 있으니, 이는 누가의 묘지석이므로
묘지의 주인은 의사 누가가 맞다는 설명이다.
바울은 전도여행시, 잠깐 에베소에 머물러 교회를
개척하였는데(AD52년경), 그들의 양육을 위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남겨두고 떠나갔다가(행18:18), 후에3차 전도여행시에는
2년 이상 머물면서, 유대인 회당과 나중에는 두란노서원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행19:10) 이 지역을 바울은 아시아전도의 중심으로
삼았으며, 이곳 에베소에서, 자신이 개척한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고전16:8) 에베소는
후에, 디모데와 사도요한이 목회하시던 곳이다.
도시가 있던 곳으로 발굴되어진 자리에는 2만5천명이 족히 앉을만한 로마식 야외극장과, 여러 신전터와 거대한
도서관시설 등이 보이며, 고대 로마인들의 목욕시설과 수세식 화장실 등,
꾸며놓은 흔적들을 보면서 그들의 사치와 지혜로운 건축공법에 저절로 탄성이 터져나오기도 하였다.
각종 조각상과 건물규모 양식 등에서 문명의 찬란하였던 흔적을 엿보게 되는 까닭에서다.
성경의 에베소 교회는, 물론 무형의 교회이다. 요한을 기념하는 예배당도 무너지고, 옛 터와 기둥만이 남아
있는데, 에베소교회는 계시록2장에서 니골라당의 행위를
반대한 것과, 사랑과 수고와 인내를 칭찬하신 점으로 보아 훌륭한 교회였음을 알 수 있다. 니골라는 처음 택한 일곱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으나, 후에 이단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처음세대의 믿음과 사랑과 인내의
행위들을 잃어버린 채, 사랑은 식어버리고, 정통교리만은 잘
지키는 교회를 책망하신 사실을 주의 깊게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에베소에는 다산(多産)의 여신 다이애나를 위한 신당이 있었는데, 그들의 간음행위 및
우상숭배와 관련되는 방종한 행위들을 ‘버가모’나 ‘두아디라’에서는 목회자들이 묵인한 것으로 여겨지나, 에베소교회에서만은 철저하게 그들을 교회에서 제명하였다는 것이다.
▲서머나(Smyrna)에서
서머나의 현재지명은 이즈미르(Izmir)이다. 터어키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라고 하는데, 한국의
현대자동차들과 LG간판들이 반갑게 여겨진다. (최근
터어키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였던 지명과 비슷한데, 그곳은 북쪽에 위한 이즈밋Izmit이라 한다.) 에베소의 항구가 퇴적물로 못쓰게 되자, 밀레도항을 이용하였고, 다시 서머나 항구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서머나는 현대까지 도시가 크게 융성하였다.
인구도 120만정도라 하니, 항구를
끼고 아름답게
건설된, 매우 깔끔한 도시였다
서머나(‘몰약’ 의 뜻)는, 서머나 교회는 박해 받는 교회의 대표적인 모형으로
알려졌다. 그 이유는 황제숭배를 거절한 까닭이었다고 한다.
즉 주후 26년경, 로마황제 티베리우스를 위한
성전을 짓도록 로마에서 요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고, 감독이셨던 폴리갑이 순교하게 되었다.
서머나 교회(계시록 2:8-11)는 흔적을 찾을 길이 없고, 대신에 주후155년에 86세로 순교한 폴리캅을 기념한 교회를 방문한다. 이 건물은 프랑스교회가 1600년에 헌납하였다고 하는데,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 사도시대와 주후 2세기를 연결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며 초대 기독교의 신앙을 지켜주었다고 전해졌다. 황제숭배를 거절한 폴리캅이 화형을 당하기전,주님을 배신할 것을 종용하자, “우리주님은 한 번도 나를 거절한 적이 없으니, 내가 어찌 배도하겠는가!” 라며 끝내 죽음을 택하였다고...
전하는 바에 따르면, 폴리갑을 태우는 장작불이 폴리갑을 피하므로
마침내 칼로 죽였는데, 솟구치는 피로 인해 타오르던 장작불이 꺼졌다고 한다. 그러자 반대자들이 폴리갑을 향하여 이치기를, “이 사람은 아시아의 선생이며,우리 신들의 파괴자요, 기독교인의 아버지다!” 라고 외쳤다는데, 이를가리켜,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이는 비난이 아니라,
마치 ‘군중의‘찬양’처럼
울려 퍼졌다고 기록하였다.
폴리갑을 기념하는 성전안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성인 폴리갑의
유골함이 놓여 있는데, 그곳에서 기도드린 이들 중에 상당수 불치병을 고쳤으며, 수많은 기적이 체험되어 전세계 신실한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서머나교회는 매우 가난한 교회였다. 그 곳 성도들이 궁핍한 이유는 신앙 때문에 직업을 빼앗기고,
심지어 폭도들에 의해 상점과 집까지 약탈당했기 때문이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고 칭찬하셨다. 대단히 좋은 교회였음이 틀림없다.
▲버가모(Bergama)에서
버가모는,
‘아에스쿨라피우스’(Aesculapius)라는 ‘뱀신’을 비롯하여 제우스와 아데미와 디오니소스를 섬기던 우상숭배의
도시이다. 이곳에는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고,
유메넷2세 왕때는(B.C.197-159)
장서 20만권이나 보유한 도서관도 있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곳 병원에서 진료했다고도 전해지며, B.C.130년에 이미 로마식민지가 된
이후, 로마의 아시아주 수도로, 정치와 행정도시로 의학
등, 학문이 크게 발전했던 곳이다. 헬라의 대왕
알렉산드로스 이후, 페르가몬 왕국에서도 수도로 지정되어 크게 발전하였고, 이러한 영광이 비잔틴시대에도 존속하였다고 전해진다.
더욱이, 이 도시는
B.C.29년에 황제에게 신전을 지어 바칠 정도로 황제숭배가 성행했던 곳이다. 그야말로
각종 우상숭배와 심지어 황제숭배까지 성행하였으니, 성경에서는 이곳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름답고도 큰
성전이 있었음에도,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며 이단성을
책망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충성된 안디바’가 순교하였다. (계2:13)
안디바는 버가모교회의 초대감독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교회가 이단자들을 수용하고 간음과
우상숭배자들의 정리되지 못한 신앙샐황을 바르게 치리하지 못하는 중에 있었고, 결국 요한계시록2:12-17에서,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과 발람의 길을
가는 이들이 있다”고 책망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안디바’ 처럼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끝까지 유혹과
박해를 이기는 자에게는 승리의 ‘흰돌’과 구원의 ‘새이름’을 주시겠다 약속하셨다.
▲두아디라(Thyatira)에서
두아디라는, 현지명으로 ‘아키사르’(Akhisar)이며,
B.C.7세기경,
리디아(Lydia)인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역시 지금은 다 무너져 내린 성벽터만 남아 있다. 동네 한복판에 있는데도 ㅂ어이상
훼파시키지 않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진다. 더욱이 울타리로 막아 놓아,
아이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존되고 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언젠가는 그 지역에서
구원으로 택정함을 입은 이들이, 기독교인들의 순례를 눈여겨 볼 터이고,
성경을 구해 읽거나 기독교인으로부터 전도를 받게되면 개종하는 경우도 기대해 볼만하다고 여겨진다.
저절로 눈에 보여지는 전도의 접촉점이 형성된 곳이라 할 것이다.
성경이 기록된 당시 두아디라성은 로마의 속령이었는데, 천에 물감을
들이는 염색일로 크게 번성하였던 곳이며, 평야지대에 있음에도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고, 상업이 번영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는 길드조직이 잘되어 있어서
상인들간에 유대관계가 대단히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조직을 이끄는 이가 이세벨 같은 여자라고 책망하셨는데, 기독교인들에게는 상인조합에
들지 않으면 상업교류를 할 수도 없었기에, 매매를 위해 하는 수 없이 조합에 가입안 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세벨같은 여자가 이를 잘 합리화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세상과 잘 어울리도록 율법을 합리화하고 교인들을 오도하였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의 신앙생활을 자기마음대로 견강부회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니, 참으로 교회는 이런 이들로 영적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두아디라성에도 순수한 성도들이 있었으니, 그들에게 끝까지 복음의 순수함을 지키라 권고하셨다. 이기는
자에게는 새벽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계시록2:28) 두아디라성 출신의 자주장사 루디아는 빌립보에서 사도바울을
만나고, 성문 밖 강변기도처에서 세례를 받고, 자기 집에서
개척교회를 열었던 여인이다. 그녀는 두아디라 성에서 자주장사 차 온,
여류사업가인데, ‘루디아인’
(Lydia)이었다고 한다.(사도행전16장14절-15절)
▲사데(Sidas)순례기
사데는, 고대 리디아(Lydia)왕국의 수도였으며, B.C.1200년경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요새였다고 한다. 폐르시아에서 헬라로, 다시
로마에 귀속되었으나, 귀금속이 나고, 또 유명한 직물 및
염색공업이 발달하였고, 사금제련등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부유한 상업도시였기에, 정치가들과 귀족들이 많이 살던 도시였다고 한다. 이
도시는 A.D.17.년에 지진으로 전부 파괴되었고,
티벨리우스황제에 의해 재건되었다가 다시 무너져 황폐하게 되었다는데, 지금은 신전의 기둥 몇 개만이 남아
있다. 사데지역은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쌓여 거의 외적의 위협이 없는 천연의 요새라 할만하며, 또한 금도 넉넉하였다고 하니, 교인들이 사치하고 방종하였던 요인이
되었고 이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 심판받은 것으로 여겨지니, 어느 누구도 재건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사데교회가 있던 곳에는 거대한 신전터가 있고, 그 한편에 초라한
예배당의 흔적이 있다. 거대한 데리석 기둥이 서있는 아데미 신전옆에 붉은 벽돌로 지은 하나님의 집은
비잔틴시대의 산물이라 하는데, 규모가 초라하여, 결국
‘살았다는 거대한 이름은 갖고 있으나, 실상은
죽은교회’라는 책망을 들을 만치, 하나님앞에서는 버림받은
교회를 나타내는 것이다.
사데지역은 황폐되었으나, 인근에 있는 ‘코푸르바시’(Kopurbasi) 만도 못한 토락한 산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앞으로 고급빌라들이 들어 설만한 풍광이나,
버림받은 사데 유적지 까닭에 어느 누구가 선듯, 들어가 살려는가!
그럼에도. 명목뿐인 사데교회에 흰옷을 받아 입고,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몇 명있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이들에게는 귀감이 되는 성도들인데, 다시 생각해 보면, 사데교회도 회개만하면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신 증거이다.
누구든지 세상에서 죄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영적싸움에서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흐려지지 않게 해주시고, 하늘에서도 시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계2:4-5)
▲빌라델비아(Philadelphia)에서
필라델피아라는 말의 뜻은, 헬라말로 ‘필라’는 사랑을 의미하고,
‘델피아’는 형제를 의미하는 두단어의 합성어이다.
곧 버가모왕국의 ‘아탈루스’(Attalus)
2세 왕이 그 형에게 바친 도시명칭인데, 그 이름을 형제사랑이라 붙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형제들 간에도 왕위찬탈 등, 얼마든지 있을 법한 상황에
있었으나 버가모 왕조의 형제들은 서로 싸우지 않고,더욱이 조카가 왕위를 계승하도록
도와 준 형제사랑이 회자되는 칭찬받는 도시였다고 하는데, 그곳의 교회 역시 책망은 전혀
없으셨고, 우리 주님께서 칭찬하신 교회이다.
성요한을 기념하는 예배당은 7세기 경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이미 훼파되었고, 모슬렘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으로 변모하였으나, 남아 있는 성전기둥을 바라보면,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 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생각난다고 한다.(계3:12)
지금도 엄장하게 남아 있는 성전기둥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크고 웅장하였겠는지, 그 시대 황제들과 성도들의 정성을 짐작게 한다.
빌라델피아는 인구도 적은 도시였다고 한다. 그들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배반치
아니하였고, 인내의 말씀을 지키었으므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받은 교회이다.
아무에게든지 네게 주어진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게 하라는 말씀으로 권면하셨으며,
이기는 자에게는 ‘성전기둥’이 되게
하고,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과 및 새예루살렘성의 새이름을 그 머리 위에 기입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골로새(Colossae)와 라오디게아(Laodicea)에서
골로새 유적지는 짐작만 할 뿐, 아직도 발굴되어지지 않은
채, 언덕배기만이 뎅그라니 보였고, 골로새 지역임을 알리는
간판만이 서 있었다. 골로새언덕에서 멀리 흰눈에 덮인 큰 산이 보이는데, 그 산기슭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현지명은 ‘호나쯔’(Honaz)라고 하였다.
골로새 언덕에서 버스편으로 북쪽으로 20분정도 달리니, 라오디게아 유적지에 당도하였다! 골로새서
4:16절에 보면, 라오디게아교회는 ‘에바브라’가
개척한 곳으로 알려졌으며, ‘히에라볼리’의 ‘빌립기념교회’와 더불어,
사도바울의 지도를 받은 교회들로 알려졌다고 한다.
라오디게아는, 알렉산더의 휘하 장군중 한사람으로 이 지역을
다스리던 셀류커스왕조의 안티오커스(Antiochus) 2세가,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서 도시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라오디게아는 ‘백성의 정의‘ 라는 뜻이다.
동서와 남북으로 교통이 잘 발달하여 군사적,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고, 현재의 지명은,’에스키힛살’ (Eskihissar)이다.
가까운 곳에 로마의 행정도시인 ‘히에라볼리’가 라오디게아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하였는데, 그곳에서 시작한
온천수가 라오디게아 도성까지 흘러왔다고 하였는데, 더우기 골로새에서 차가운 물이 ‘파묵깔레’에서 흘러들어 온 온천수와 합쳐져서 라오디게아의 물은 섞여져서 미지근한 물이 되었고, 온천수의 치료효과도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되었으니, 주님은 이를
비유로 하여,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는 말씀과, “입에서 토하여 내치시겠다” 는 말씀으로, 교회신앙의 세속화 된 점을 책망하신 것이다.
유적조사팀이 현재도 발굴을 계속하고 있는 현장에는, 화강암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역시 무너져 버린 잔해 뿐이나,
그 속에서 로마식 행정명칭인 ‘히에라볼리’의
정확한 위치 등이 찾아짐으로써, 성경의 지명이 매우 정확하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우쳐 주었다.
라오디게아에서 7km쯤 떨어진 곳에 ‘파묵깔레’(Pamukale)라는 곳이 있다. 이는 ‘목화성’을
의미하는 말로, 그 지역의 과거 로마시대의 지명은 ‘히에라볼리’이고,
현재명칭은, ‘아코이’(Akkoy)이다.
이 파묵깔레는, 기원전
190년경, 버가모왕 에우메네스2세가 건립한
일종의 의료시설이었다고 한다. 곧 이곳 온천수에는 다량의 석회질이 함유되었는데, 이 온천수로 몸을 씻으면 각종 질병이 치유되었다고 한다.
파묵깔레의 온천 물은 섭씨 35도에 이르며,
특히 귀병과 눈병에도 좋다고 하며, 성경이 이름같이 이지역에서 나는 안약은 매우
유명하였다고 한다.(계3:8)
각종 병인들이 이곳에 찾아와서 머물며 치료를 받던 곳으로도 유명한데, 심지어 로마의
귀인들도 많이 찾아왔으며, 라오디게아는 의료의 도시로도 명성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불행히도 고침받지 못한 채, 기다리다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은 이들의
무덤들이 ‘파묵깔레’ 입구좌우에 널리 있었으며, 심지어 중국식 봉분과 기와집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심한 지진으로 파손된 채, 버려져 있었다.
골로새서 2:1, 3:13-15, 및 4:16의 기록을 보면 라오디게아교회에는 “눔바” 라는
여인의 집에서 처음교회가 가정교회의 형태로 시작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사대교회와 함께 칭찬은 없고 책망만 받은 매우 불행한
교회이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사데교회와 더불어 물질이 넉넉하였고 권력기반과 가까왔으며, 모든 사회적 생활여건이 만족하다 할 만큼, 당시의 지배계급이 많은
합리적이고, 또 이성적인 교회였으나, 아쉽게도 예수님께서
버리신 현대교회의 명목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모인 교회가 있다면 이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라 할 것이다.
뿐만아니라, 버가모교회와 두아디라교회는, 종교적 간음을 정당화하였고, 육체적으로도 이를 합리화, 수용하였으며, 우상숭배 역시 허용하였으니 명백한 이단교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서머나교회와 빌라델피아교회는 가난하며 적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신앙의 순수함을
지켜냈으며,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은 모범적인 교회들이었다.
나머지는 칭찬도 받고, 책망도 받은 보통의 교회들이라 하겠으나, 버림받은 교회에서도 몇몇 구원받을 만한 순수한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 주님께서는 믿음없는 이들을 향하여, 계속해서 회개하고 돌아오라며 구원의 길, 영원한 생명에로 초청하신다. 할렐루야!
지난 2003년 성지순례 때를 기억하며 해피맘의 요한계시록 큐티에 도움을 주고자 ,,,,
우리 공부 좀 잘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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