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계성구
[왕하 25:22-25]
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남긴 자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로 관할하게 하였더라 모든 군대 장관과 그 좇는 자가 바벨론 왕이 그달리야로 방백을 삼았다 함을 듣고 이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느도바 사람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마아가 사람의 아들 야아사니야와 그 좇는 사람이 모두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에게 나아가매 그달리야가 저희와 그 좇는 자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신복을 인하여 두려워 말고 이 땅에 거하여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십인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저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렘39;14]
보내어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서 취하여 내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붙여서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매 그가 백성중에 거하니라
@ 배경과 해설
그달리야 (그다랴) 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라는 의미이다.
그달리야는 요시야왕 때의 서기 사반의 손자이자 아히감의 아들이었다.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남아있는 백성을 다스리도록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렘40;7). 그달리야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레미야의 친구였으므로 그달리야도 아버지의 감화를 받아 예레미야의 예언을 따랐다. 그는 단순히 느부갓네살에 의해 총독으로 세움받은 은혜에 보답코자 친 바벨론파가 된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언과 예레미야의 권고를 받아들인 선택으로 바벨론과 연합하게 된 것이다.
그달리야는 신앙의 사람이며 현실에 대한 판단이 정확했고 지혜와 관용을 겸한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달리야가 유다를 짧은 기간에 나라의 어려운 문제들을 정리했고 모든 유대인은 용기와 희망을 갖고 그를 따랐다.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그달리야를 중심하여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는 선민의 결속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달리야를 시기하는 두 세력이 있었는데 하나는 암몬 왕 바알리스가 유다를 통합하려는 야심이었고 다른 하나는 왕의 종친인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의 적개심이었다.
결국 이 두 세력이 연합, 이스마엘이 십 인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살해함으로써 패망 후에 안정을 되찾던 유다나라에 불행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왕하25;25, 렘41;2). 그달리야는 2개월밖에 통치하지 못했으나 존경의 대상이었다.
@ 교훈
1, 그달리야가 새 총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방으로 피난갔던 유다인들이 미스바로 귀환하였다. 이로써 하나님의 뜻을 따른 그다랴의 정책은 일시적이나마 성공을 거두었다 (렘40;12). 즉 그달리야는 유능한 사람이기보다 존경의 대상이었다. 지도자는 민심을 얻어야 한다.
2, 민심은 돈과 권세로 소유되는 것이 아니다. 더우기 지도자가 배신감으로 민심을 잃는 것은 슬
픈 일이다.
3, 그다랴는 국수주의지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즉 그다랴를 죽인 자들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던 무리들로서 (렘16;24). 끝까지 자신들의 힘으로 유다를 회복사키려는 자들이다. 이것은 바울이 사도바울이 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하여 그릇된 열심을 내었던 것과 같이 (행9;1-9),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내세우는 행위였다 9마19;16-20. 잠19;21).
4, 그다랴와 그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레미야와 각별한 사이였다. 그래서 그다랴도 그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 같다. 좋은 이웃과 사귀자.
@ 묵상성구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보호하여 예레미야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렘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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