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하늘의 언어(기독뉴스에서)

하늘향기내리 2007. 8. 4. 16:28
뉴스 홈 > 기독뉴스 > 인물
"하늘의 언어, 한국 교회 거룩함 회복 자양분"
김우현 감독이 말하는 <하늘의 언어> 코드
[뉴스파워] 2007년 07월 19일
▲ 김우현 감독  뉴스파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널리 알려진 김우현 감독이 최근에 <하늘의 언어>라는 책을 냈다.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하늘의 언어’는 방언이다. ‘지성적인 사람이 웬 방언?’이라고 할 만큼 그리 무게 있어 보이지 않는 주제다. 또 이미 교회사 가운데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고 이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하는 가운데 있는데 새삼스럽게 김우현 감독이 ‘방언’이라는 주제를 말을 한다는 것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서 내친김에 서점에서 그의 책을 사서 읽었다. 책은 호기심을 넘어 여러 가지 궁금했던 ‘방언’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그를 만나보았다.

“방언에 대해 내 자신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은 은사입니다. 20대에 방언을 받았지만 별로 사용하지도 않았고 부정적인 개념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40이 넘도록 그 귀중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미국 동부에 집회를 하러 갔을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전략을 제게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이 방언입니다.”

그가 방언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뉴욕의 타임스퀘어교회에서 시작한 작은 기도회 모임에서다. 동석이라는 형제에게 방언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연 것이 ‘하늘의 언어’의 시작이라고 했다.

김 감독은 마치 방언을 열게 하는 전도사처럼 방언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신도 처음에 방언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퀘어교회의 중보기도 모임에서 시작된 방언의 역사는 부흥에 대한 새로운 전략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하늘의 언어>에 등장하는 ‘동석’이라는 인물은 항상 주목받지 못하는 형제다. 어릴 때 할아버지가 손주를 위해 용봉탕을 먹게 했는데 그것이 그만 머리카락을 나지 않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놀림을 받고 자라서 늘 열등감과 상처로 안고 지내던 동석이를 방송작가가 자신의 동생이라고 살펴달라고 해서 만난다. 이것이 동석이와의 인연의 시작이다. 그가 타임스퀘어교회에서 김 감독을 통해 방언을 받게 했다. 동석이를 ‘가장 작은 자’라고 부르는 김 감독은 그의 방언이 바로 하나님의 부흥코드의 새로운 장을 펼치는 시작이었다고 했다.

“방언은 생소한 은사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초대 교회를 지나 3세기를 넘기면서 방언에 대해 소홀하게 대했습니다. 오늘날 오순절 운동에서 방언을 하나의 은사로 보지만 대부분 방언은 개인적인 것으로만 치부하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아예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하나님은 방언을 통해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방언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신학적인 논쟁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방언의 유익성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다, 하나님의 주신 은사는 후회함이 없다. 그런데 방언 은사를 방치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김 감독의 말대로 하나님의 은사를 멸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방언은 한편으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을 통해 역사한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이들처럼 하나의 언어일 뿐인데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

“방언의 유익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 방언은 방치되고 무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방언은 외국어이기도 했지만 고린도서에 나타난 방언처럼 이 세상에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즉 다양한 종류의 소리라는 것이고, 또한 방언은 육신의 언어가 아니고 영의 소리라는 점에서 우리가 듣는 단순한 육적인 말이 아닙니다. 더구나 방언의 유익은 우리 영을 성결케 한다는 것입니다. 방언의 경우 대부분 반복적인 말이 계속되고 알아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방언의 유익과 의미를 제대로 알고 나면 그런 불평보다 오히려 방언의 유익을 통해 하나님의 비밀을 더 사모하게 됩니다.”

뉴욕의 한 교회에서 시작된 방언의 역사는 지속적으로 퍼져 나갔다. 김 감독은 하나님께서 여러 경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도록 길을 여시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규장문화사에 소속된 직원들이 모두 방언을 받는 사건이다. 가장 먼저 방언을 받은 사람은 규장의 대표인 여진구 사장이다. 일본을 방문했던 그가 손기철 장로에게 방언을 받았다. 그리고 방언을 외국 언어로만 이해하고 있던 편집국장인 김응국 목사가 사장이 방언 받았다는 말에 부담이 되어 “하나님 저는 이미 영어라는 외국어 방언을 받았으니 방언을 받은 것으로 쳐주시고 더 이상 이런 부담을 갖지 않도록 특단의 조치를 취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설교준비하면서 그런 기도를 하던 김 목사에게 성령의 불이 임하여 방언이 터져버린 것이다. 김 목사는 성령께 사로잡혀 방언을 하며 거의 1시간 이상 혼자 집에서 통곡과 회개로 나뒹굴었다고 한다.

“김응국 목사님은 단순히 방언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탄식으로 영혼을 위해 중보하는 은사까지 동시에 받았습니다. 예전에는 성도를 위해 짧은 기도만 했던 그가 이제는 한 영혼을 위해 30분 기도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규장의 직원을 하나님께서 차례로 점령하셨습니다. 갓피플의 조한상 사장, 규장의 이한민 실장을 비롯해 전직원이 방언을 받았습니다. 방언을 받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분들이 지속적인 기도를 통해 성령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역사를 보게 하셨습니다.”

방언은 단순한 은사이지만 그것을 시작으로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일을 펼치신다고 했다. 우선 방언은 성령과 함께 기도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열게 하신다는 것이다. 대부분 처음에 방언을 받으면 신기해서 열심히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방언은 하나님의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 방언을 통해 거룩함이 회복되고 성결해지고 자신의 영이 청소된다는 것이다. 일종의 가지치기다. 그런 가운데 방언을 통해 하나님은 여러 가지 놀라운 일을 보여주시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하신다는 것이다.

더구나 방언은 성령님과 함께 기도하기 때문에 결코 자신의 유익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비밀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듣지 못한다고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하루에 1시간 이상 방언기도를 하면 굉장한 영적 유익이 있다는 것이 김 감독의 말이다.

“초대교회는 방언이 보편화된 시대입니다. 그런데 방언의 무질서로 인해 바울이 방언을 경계하고 그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방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하는 현상에서 생기는 것들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선험적 선입견을 가지고 방언을 대합니다. 그래서 방언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방언의 은사 자체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고 방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김 감독은 지금은 방언도, 예언도 잘못된 쓰임으로 인해 많이 위축되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 이런 것을 하나님은 기도하는 이들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은사들이 대중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향하지 않고 개인의 이익과 인간 중심의 유익을 구하게 되면서 왜곡의 역사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는 방언 만능과 방언 지상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왜 하나님이 다시금 초대교회의 방언의 은사를 부어주시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우현 감독에 따르면 방언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다. 고린도전서 14:4절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덕을 세운다’는 것은 헬라어로 ‘오이코도메오’, 즉 ‘집을 건축한다’라는 의미다. 방언은 우리의 영이 기도하는 것으로 ‘영의 집’, 즉 우리의 속사람을 강화하고 세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을 할 경우 개인의 유익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고 그것으로 자기의 영이 세워지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두 번째 종류의 방언은 외국의 방언이라고 했다. 불신자를 위한 표적으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믿음이 없는 자에게 믿음을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사야 28장 11절의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불신하는 자들이 방언을 하는 것을 보더라고 믿지 않을 것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세 번째는 중보기도의 방언이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듯이 우리 영이 방언을 통해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김 감독은 실제로 이런 중보기도의 방언을 통해 우울증에 걸려 있던 분이 방언기도를 통해 회복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성령을 통해 중보하는 이들의 상태를 알려주시고 그 사람을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게 하는 방언이 바로 중보기도 방언이다.

네 번째 방언은 통역하는 방언이다. 방언을 통해 방언을 하는 것이다. 김 감독은 방언의 깊은 기도는 내 영을 회복하고 성전인 자신을 대청소하고 자아가 정리되어 하나님의 영이 말씀하시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성령의 말씀하심을 듣게 된다고 했다.

“방언은 한국교회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전에 방언을 멈추거나 소홀히 여겼던 분들이 다시금 방언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이 손을 붙잡게 될 것입니다.또한 방언을 갈망하게 되어 방언을 받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새로운 부흥의 길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방언의 은사나 그 현상 자체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의 언급에서 바울은 방언을 금한 것이 아니라 무질서한 방언이 교회를 어지럽힌 것에 대한 염려일 뿐 오히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의 말씀처럼 방언의 유익과 성령과의 연합, 그 안에서의 영의 놀라운 비밀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그는 방언은 우선 신자의 회복에 의미가 있다고 했다. 영의로 하는 기도가 신자의 온갖 묶임과 교만, 쓴 뿌리 같은 것을 없애고 치료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기뻐하심의 간구(롬 8:27)로 인해 성령과 더불어 간구하는 방언은 음부의 권세를 무너지게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김 감독과의 인터뷰 전문

Q. 뜻도 모르는 이 이상한 언어를 계속하는 이유는?
가장 많이 고민하는 문제다. 또 방언기도를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기감을 갖게 하는 이유다. 그러나 방언의 유익은 그 의미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방언은 ‘영의 언어’(고전 14:2)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알 수 없는 언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 한 것이다. 마음 즉 육신은 방언의 내용을 알지 못해 답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방언을 하고자 하는 의지는 그 말씀의 권면에 순종하여 지속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방법이고, 감정이나 체험의 영역을 넘어서 가장 오래 할 수 있는 힘이다. 처음에는 막막하고 힘들지만 방언을 계속하다 보면 더 많은 유익을 얻게 된다. 이미 많은 분들이 방언 기도를 지속하다가 많은 유익을 얻었다. 성경도 더욱 깊이 읽게 되고 성령의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하는 분들이 많다.

특별히 방언은 ‘순종’을 배울 수 있는 축복의 은사다. 하나님나라는 순종이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그 순종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수준까지 차면 우리를 가로막은 그 어떠한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능력(고후 10:4)으로 나타날 것이다.

Q. 방언을 하는 이들 중에는 교회의 권위나 질서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열매 없는 모습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단순히 방언을 한다고 더 깊은 영적 수준이나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강퍅하고 이기적인 경향이 나타날 수도 있다. 성경은 항상 그것을 구하는 동기를 묻는다. 개인의 필요나 유익만을 구한다면 그 은사는 더 해로울 수 있다. 사탄이 교만이나 불법으로 이끌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성령세례를 ‘기름부음’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이 기름부음이 한 개인의 것이 아님을, 다른 영혼에게 흘러 보내기 위한 것임을 나타낸다. 섬김과 봉사로 이 기름부음을 유통시키지 않으면 내 안에 고여서 썩게 된다. 이 점이 그 동안 은사에 집중한 이들에게 일부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고전 14:1)라고 강조한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각양 은사를 주심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엡 4:12)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본질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을 때, 항상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가진 분들 중에는 교회의 권위나 질서를 무시하고 자기가 받은 능력에 초점을 맞추어 성령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이들이 많다. 아무리 큰 능력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은 교회의 직분 질서나 각 지체에 대한 순종과 섬김이 없는 이들을 가리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수없이 경고하셨다. 왜냐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도도히 지향하는 그 흐름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다른 은사나 직분을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고전 12:29-31).

Q. 방언의 은사에 치중하다가 성경 보는 것을 등한히 여기고 자신의 기도체험에만 몰두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
“말씀 없는 성령, 성령 없는 말씀, 둘 다 기독교의 치명적인 적이다. 말씀과 더불어 성령, 성령과 더불어 말씀이 정답이다. 성령을 따라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결코 폄하하지 않을 것이다. 성령은 ‘진리의 영’(요 14:17), ‘말씀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진실한 자세로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은 진리와 함께, 말씀과 함께 진심으로 기뻐할 것이다. 그래서 말씀의 사람, 성경의 사람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말씀과 유리된 기도생활은 불건전한 체험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만다.

참 방언의 사람은 참 성경의 사람이 된다. 기도한 시간만큼 성경을 보라. 아니 그 이상의 성경을 보라. 주야로 성경을 목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경에 기반한 방언기도는 우리를 더 깊은 영성생활로 인도할 것이다.

Q. 교회사에는 방언을 하지 않아도 능력을 나타낸 이들이 많았다. 꼭 방언을 해야만 그런 능력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가 아닐까?
“방언은 초대교회에 강하게 나타났고, 3,4세기에는 거의 사라졌다. 20세기에는 다시 폭발하듯 나타났다. 그리고 오늘날 이만큼 보편화된 것이다. 물론 교회 역사상 많은 위인들이 다 방언을 한 것은 아니다. 한국 교회에도 깊은 영성을 지닌 분들 중 방언을 못하는 분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서 놀라운 말씀의 능력과 교회를 섬기는 역사가 나타났다.

그들의 특징은 말씀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이들은 지순한 충성과 섬김으로 성령의 열매를 나타냈다. 이 또한 성령의 역사이며능력으로 이룬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언이나 치유, 축귀, 환상과 같은 역사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언이나 치유, 축귀, 환상과 같은 은사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신학적으로 그런 성령의 역사를 깊이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오순절처럼 하나님께서 그런 역사를 폭발적으로 열어주시는 ‘특별한 때’가 있다. 그러니 인격적인 성령님은 우리의 인식으로 제한받으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우리의 ‘자유의지’와 ‘믿음의 선택’을 귀중히 보시고 기다리신다.

그러는 사이 사탄은 교회에 침투하여 성령의 역사를 인간적인 의와 지식으로 대치해버렸다. 자료를 찾아보니 A.D 300년 정도까지 교회에는 일반적인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넘쳐났다. 사역자들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치유나 축사 등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자 성령의 역사는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20세기 최고의 복음주의적 지성인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성령님이 2천 년간이나 교회사에서 무시당해왔다”고 외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치유나 기적은 예수님 시대 이후 끝났다’고 믿었다. 그런 관점을 소유한 이들에게 귀신들림과 같은 현상은 극심한 편두통의 부작용 정도로 여겨진 것이다. 그런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성령님이 그들 가운데 역사할 자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보혜사 성령님이 그들을 떠났셨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었다. 결국 성령님의 역사는 말씀과 섭리에 집중되어 있고, 하나님의 측량 못할 사랑으로 교회의 필요에 따라 허용하실 수도 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너무나 다양하고 깊다. 우리의 달란트가 다양하듯이 성령님께서 주시는 부르심과 능력은 넓고 그 한계를 측정할 수 없다. 바울 서신에서 나타나는 은사들은 그 당시 교회를 위한 ‘목양적 차원’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치유나 축귀보다 ‘지식과 지혜의 말씀’을 더 중요시 여기고 그것을 구하는 이들에게는 그런 능력으로 부어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르심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방언을 하든 하지 않든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지향한다. 우리가 내 안에 계신 그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순종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진다. 나 또한 그토록 제자로 살기를 꿈꾸었으나 40세가 넘어서야 성령님을 온전히 만났다. 그것은 마치 제자들이 오순절을 경험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동안 크고 작은 성령 충만의 과정들이 있었으나, 진정으로 변화되어 오직 성령님께 붙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그전에는 성령체험에 집중한 소위 ‘은사주의적’인 풍경에 혐오를 느껴 성령님을 무시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보다도 성령님에 대한 ‘무지’가 그런 오류를 범하게 했다. 그래서 내 안에서 그보다도 성령님을 오랫동안 방치하고 무시했던 것이다.

18세게 계몽주의 철학으로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게 되고 철학은 신학에 영향을 미쳐 결국 기적과 표적을 제거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이 매우 비이성적이라는 편견까지 심어주었다. 이런 모습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 성령의 역사를 추구한 이들의 지나침도 사람들에게 꺼림이 되었지만 더 분명한 것은 흑암의 세력이 인본주의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없애려고 조장해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양봉식 기자